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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철길이라는 가시를 뽑다

글 _ 강지영 객원기자

손끝에 가시가 박혔다. 이물감은 느껴지는데 통증은 없다. 살을 파고든 가시가 뼈를 휘감아 들고 여린 살은 굳은살이 되어가고. 통각은 그만큼 무디어졌다. 무감각을 타고난 듯 가시가 살을 찌르는데 아프지가 않다. 손끝을 누른다. 덜커덩덜커덩. 소리가 귀를 두드리고 들어온다. 칙칙폭폭. 멀리서 들려오는 기적(汽笛)이 혈관을 가로막고 선다. 아득하고 아련하다. 저 너머에 태백의 기상이 담긴 낙동강이 있는데 닿을 수 없다. 철로가 길을 끊어버린 까닭이다. 손에 박힌 가시 같았던 철로를 걷어낸다는 소식이 바람을 타고 들어온다. 

8월 무더위의 종착지는 안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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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들의 고향, 임청각

  10명의 독립투사가 났다는 집, 임청각을 찾아간다. 임청각과 법흥사 칠층 전탑을 뒤에 두고 낙동강을 내려다본다. 뜯겨나간 철길이 놓였던 자리와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가벽(假壁), 그 너머로는 강원도에서 발원한 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길을 가로막아서까지, 가옥을 뜯으면서까지 일본이 막아서고 싶어 했던 열의와 열정이 낙동강을 채우고 있다. 그 가운데 애국(愛國)이라는 두 자를 적어본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용솟음치며 가슴을 두드리고 들어온다. 


  임청각은 500년이라는 세월을 머금은 현존 최고(最古) 살림집이다. 신흥 무관학교를 세운 이상룡 선생을 포함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 10명의 출생지로 알려진 임청각은 건물이 뜯겨나가는 수난을 겪었다. 일본이 독립운동의 맥을 끊으려 철길을 놓는다는 명목으로 행랑채를 포함한 건물을 없애버린 것이었다. 99칸이었던 임청각은 49칸이 철거되어 현재는 군자정을 포함한 남겨진 건물만이 역사의 아픔을 전하고 있다. 


  갈라지고 뒤틀리는 수모를 지켜보며 혈맥이 드나드는 통로가 되어주었던 임청각 앞 칠층 전탑을 올려다본다. 탑을 돌며 벽돌 하나하나에 쓰라린 시간을 읽는다. 뜯겨나간 기찻길을 넘어다보며 손을 편다. 손 가운데 박혀 있던 투박한 돌 같은 가시가 떨어져 나간다. 길을 옥죈 기찻길 위로 나지막이 날아가는 새들. 활공하는 새를 보자니 차갑게 식은 손에 온기가 감돈다. 살이 되어가던 가시가 빠져나가더니 막혀있던 혈이 풀린 듯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강 위를 걷는다. 길 끝에 월영교가 있다. 월영교는 먼저 떠난 남편을 그리는 마음을 담아 머리카락으로 미투리를 만들었다는 원이 엄마의 이야기가 서려 있는 다리다. 387미터에 달하는 이 다리는 한국 최장 목교(木橋)로 연인과 함께 걸으면 영원한 사랑을 이어갈 수 있다는 설이 깃들어 있다. 뜨거운 햇살에 몸을 맡긴 채 물 위에 뜬 보름달 같은 월영정을 향해 간다. 월영정에 올라 달(月) 배를 타고 강을 거니는 이들을 본다. 낮에도 달을 불러내 여유를 즐기는 이 평화가 거저 주어진 것만은 아니리라. 희생과 애국, 독립을 가슴에 새기며 도산서원을 향해 간다. 


도산서원도산서원


퇴계 선생의 숨결이 깃든 도산서원

  굽은 길을 차로 달린다. 길이 때로는 형틀이 될 수 있음을 되새기며 기찻길의 잔영을 지워나간다. 들판을 채운 벼가 바람을 따라 누웠다가 일어섰다가. 예술작품으로 채워진 예끼 마을을 거쳐 도산서원 초입으로 들어간다. 역사의 상흔에 덧대어진 자연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달린다. 녹음을 그늘 삼아 이른 곳에 퇴계 선생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 


  바람과 두 그루 고목이 빚어내는 투명한 선율이 여객을 맞는다. 우물 앞에 멈춰서서 호흡을 고른다.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이 생전에 제자들과 학문을 도야하고 세사를 논하던 도산서당과 선생의 사후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추증한 도산서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산서당을 거쳐 전교당에 이른다. 자신보다 한창 어린 기대승 선생의 서신을 예를 다해 대함을 보여주며 학문에의 진정성을 몸소 알려주었던 퇴계 선생. 돌아온 길을 내려다보며 ‘진정한 용기와 굳건함은 기세 높인 주장이 아니라 잘못을 바로잡는 데 인색하지 않고 의(義)를 듣고 곧바로 따르는 데 있다.’고 말한 선생의 말을 되새겨 본다. 서원을 나서기 전, 퇴계 선생의 학문을 기리고자 ‘도산별과’라는 특별과거를 시행한 곳인 시사단을 눈에 담는다. 섬이 되어 놓인 푸르른 시사단에서 서원 건물에 켜켜이 겹쳐져 있던 학문에의 열정과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읽는다. 


임청각임청각


이육사 문학관에서 되뇌는 <광야>

  나뭇잎이 빚어내는 초록빛 하늘이 녹색 물거품이 되어 안긴다. 철썩철썩. 나무와 바람이 빚어내는 물결이 가슴을 밀고 들어온다. 시간의 물을 타고 이육사 문학관으로 간다. 40년의 짧은 생애를 살다 간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육사 선생. 나라를 찾기 위한 독립운동과 17번의 수감과 옥중 서거. 자필로 눌러 쓴 서신과 문학작품에서 눈물과 울분을 본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오늘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마주했을 선생의 글귀를 앞두고 고개를 숙인다. 푸른 청포도가 탐스럽게 익어가는 계절, 눈에 맺히는 이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감사의 다른 이름이리라. 투명한 초록빛 눈물을 삼키며 되뇌는 시 구절은 <광야>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노아 부르게 하리라.’ 험난한 시간을 견디고 백마 위에 앉은 선조들의 잔영을 삼킨다. 턱까지 차올라 있던 숨이 쏟아져 내린다. 고여 있던 시간의 웅덩이가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번져나간다. 


이육사 문학관이육사 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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