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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자수가 교차하는 땅, 평창

글_ 강지영 객원기자

전나무 잎이 바람을 연주한다. 그윽하고 잔잔하다. 눈을 밟으며 찾았던 숲에 봄기운이 감돈다. 몽우리를 터뜨린 새싹의 속삭임을 벗 삼아 들어선 오대산 초입, 늘씬하게 뻗은 전나무를 올려다본다. 촉촉한 흙내음이 코를 타고 들어온다. 폭신하고 몽글거린다. 커튼을 걷듯 겨울을 걷어내며 투명한 그늘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문을 넘어섰을 뿐인데 마치 다른 세계로 건너온 듯한 청량감이 발을 타고 올라온다. 코를 지나온 평창의 싱그러운 봄이 폐부를 거쳐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4월이다, 그리하여 이윽고 봄이다. 이 찬란한 계절에 평창을 찾는다. 


기사 이미지월정사 전나무 숲길


  바람과 발소리가 전부인 숲을 걷는다. 마스크에 가려져 있던 지난 시간을 되돌려 본다. 침묵을 머금는다. 소리를 내놓지 않는다고 소리를 잃은 것은 아니었을 터. 마스크와 손 세정제를 벽 삼아 나를 그리고 너를 위한 마음을 지켜온 시간이 발자국이 되어 찍힌다. 천 팔백여 그루 전나무가 고적한 여행길의 든든한 벗이 되어 안긴다. 부처님 공양 그릇에 눈(雪)을 떨어뜨려 벌을 받게 된 소나무를 베고 전나무 아홉 그루로 절을 지키게 했다는 숲길의 유래를 곱씹으며 금강교에 이른다. 월정사가 눈앞이다. 다리를 지나 대웅전에 이른다. 대웅전 마당을 지키고 선 팔각구층석탑과 손을 모아 앉은 석조보살좌상.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재단한 듯 놓인 지상의 사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등을 보이며 앉은 석조보살좌상과 석상을 응시하고 있는 대웅전과 고개를 든 석탑.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더없이 조화롭고 평화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벽을 친구삼아 살아야 했던 날들을 지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성보박물관성보박물관


이효석 문학의 숲이효석 문학의 숲



상원사에 담긴 세조 이야기

  상원사로 간다. 문수보살을 만난 이후 왕이 되었다는 신라 성덕왕이 지었을 당시의 상원사 이름은 진여원이었다. 이후 진여원은 상원사가 되는데 여기에는 조선 세조의 이야기가 서려 있다.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꿈에서 자신을 저승으로 데려가려는 현덕 왕후를 만난다. 세조가 버티자 현덕 왕후는 세조에게 침을 뱉는데 이후 세조는 피부병으로 고생을 하게 된다. 병을 고치려 전국을 돌아다니던 세조는 상원사 앞에서 목욕을 한다. 그 과정에서 동자승이 세조의 등을 밀어주고 알몸을 보인 것이 마음에 걸린 세조는 동자승에게 왕의 알몸을 보았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자 동자승이 말한다. 문수동자를 만났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이러한 이유로 상원사에는 문수동자상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상원사 초입에는 세조가 옷을 걸어둔 곳이라고 하여 관대걸이가 자리하고 있다. 


  상원사로 들어간다. 문수동자상이 자리한 문수전 앞에는 고양이 석상이 있다. 상원사 법당에 들어서려던 세조를 막아 세워 목숨을 구해준 고양이를 위해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경내를 돌아 나와 동종 앞에 선다. 몇 구 남아 있지 않은 신라 동종 중 가장 오래된 동종인 상원사 동종은 안동루에 있던 것을 세조가 옮겨온 것이다. 동종에는 국태민안을 바라는 왕의 염원이 깃들어 있다. 유리 속 종과 그 옆에 놓인 모형에서 시대의 화음을 읽는다. 속으로 우는 신라 동종과 소리 내 눈물 흘리는 모형 동종. 울림은 다를지라도 나라의 평온을 바라는 그 마음은 하나일 것이다.


월정사 적멸보궁에서 느낀 비움과 채움

  월정사를 거쳐 상원사에 이르렀으니 진신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을 놓칠 수 없다. 적멸보궁으로 방향을 잡는다. 월정사 적멸보궁은 진신사리를 안치한 곳이라는 뜻의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처음으로 사용한 곳으로, 오대산에 머물던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에게서 직접 받은 부처님 사리라는 설이 깃들어 있다. 진신사리를 봉안했기에 불상을 안치시키지 않는다는 적멸보궁. 비워진 불단에서 채움을 본다. 비어 있는데 충만하고 가득한데 성기다. 봄바람이, 쥠은 비움에서 오고 비움은 쥠에서 오는 것이라는 깨우침을 놓고 간다. 


  길을 돌아 나와 이른 곳은 의궤박물관과 성보박물관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의 역사에 기반해 설립된 의궤박물관은 106점의 전시물을 보유하고 있다. 발길은 왕실 행사를 그려낸 의궤의 색감과 정치한 묘사를 따라 조선으로 들어갔다가 어느새 성보박물관에 이르러 있다. 4,000여 점의 성보(聖寶)가 있는 성보박물관에서 월정사의 석조보살좌상 원본과 문수동자상, 적멸보궁 진신사리와 세조의 피부병 흔적이 남은 명주 적삼을 만난다. 평창 곳곳의 역사가 한곳에 모여 시간의 샘을 만들어내고 있다. 샘의 울림이 가슴을 두드리고 들어온다.


월정사월정사


이효석 작가의 숨결이 깃든 문학의 숲

  숨을 돌려야겠다. 차로 삼십여 분을 달려 이른 곳은 ‘이효석 문학의 숲’이다. <메밀꽃 필 무렵>을 테마로 만든 숲에는 이효석 작가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 장터를 지나 충주집을 거쳐 물레방앗간과 디딜 방앗간을 지나온다. 펜의 힘에서 비롯된 것인지 생의 구슬픈 서사가 자아낸 것인지. 발길을 내려놓은 곳곳에서 흐드러지게 핀 허연 메밀꽃과 누렇고 투명한 달빛을 본다. 


  숲 향에 물들어, 문학에 취해 거닐다 보니 숲을 벗어날 즈음에는 이효석 작가의 표현처럼 ‘숨이 막힐 지경’이 되어 있다. 해는 산을 넘어가고 평창은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평온함을 전해오고, 집으로 돌아가는 외길에서 메밀꽃 필 무렵의 ‘외줄로 늘어서 가는’ 세 사람의 그림자를 만난다. 좁은 길 위에 메밀꽃이 놓이고 계곡이 덧대 지더니 전나무 잎이 하늘거리기 시작한다. 그 위로 종소리가 완만한 타원을 그리며 퍼져 나간다. 그렇게 오늘이라는 시간의 자수가 한 땀 더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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