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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완성을 경험하는 미술 수업

글·사진 _ 김보법 대구감천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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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계(scaffolding)

  비계란 원래 건축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다음 층을 올리기 위해 설치하는 발판이나 시설을 의미한다. 교육에서는 학생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도록 교사가 수준과 단계에 맞추어 제공하는 지원을 비계라고 한다. 비계설정이 이뤄진 수업 사례를 한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초등학교에서 미술 수업을 하다 보면 내 뜻대로 되는 날이 드물다. 훌륭한 결과물이 나오긴커녕 제시간에 수업을 마치는 것조차 힘들다. 주지 교과에서는 이런 경우 ‘수업 설계’에 오류가 있다며 반성하기 마련이지만 유난히 미술 수업에 있어서는 교사들이 자신에게 관대하다. 미술 수업이 잘 흘러가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수업 설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미술 수업 설계에 고려될 요소들은 무수히 많지만, 이 글에서는 ‘과업’과 ‘비계설정’만 다루려 한다.


  제대로 설계되지 않은 미술 수업은 학생들에게 과한 과업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임무 하나에 에너지를 몰아줘야 한다. 이것이 바로 ‘비계설정’이다. 주제와 거리가 먼 기술이 수업에 필요 없다면 아이디어(발상)에 확실한 도움을 주는 비계설정이 필요하다. 이것이 핵심이고, 모든 아이가 ‘완성’을 경험하게 하는 마법이다. 


"미술에서 완성의 경험은 정말 중요하다. 이 경험은 성공과도 같다. 

계속 맛보는 완성과 성공은 곧 성취감으로 이어진다. "


수업 하나, 동물 타이포그래피

  초등학교 미술 교과서 활동들을 살펴보면 ‘글자’에 대한 활동들이 꽤 있다. 그중 하나인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는 글자와 이미지를 결합하여 디자인하는 것을 말한다. 타이포그래피 수업을 하고 싶은데 무작정 던져주자니 글자 주변을 예쁘게 꾸미기만 할 것 같았다. 초등학생 수준에서 타이포그래피 디자인 수업을 완성도 있게 하려면 어디에 비계를 설정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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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까운 곳에서 소재 찾기

  이번 미술 시간에 할 활동은 ‘타이포그래피’라는 것을 명심하고 시작해야 한다. 글자를 이미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대단한 그림 실력은 필요 없다. 어떤 이미지를 가져올 것인가만 정해지면 된다. 이미지를 정해주는 것이 비계가 될 것이다.

학생에게 친숙한 소재를 이미지로 사용한다. 바로 동물이다. 소재를 동물로 정했을 때 발상은 1분 만에 끝낼 수 있다. 생김새, 울음소리, 이름, 경험과 같은 모든 정보가 이미 머릿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대단해 보이는 소재는 부담감만 줄 뿐이다. 가볍게 생각할수록 시작은 재미있다.


2. 오직 타이포그래피만 남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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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을 소재로 한 타이포그래피 수업을 계획하려고 하니 동물을 그리는 것 자체가 큰 미션이 된다. 명심하자. 수업의 핵심은 ‘타이포그래피’이다. 동물을 그리는 것보다 그것에 맞게 글자를 변형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그렇다면 동물 그림은 당연히 비계로 설정해버리면 된다. 동물을 그릴 필요가 없게 동물 테두리 그림을 인쇄하여 준비한다. 학생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동물 테두리 그림을 고르면 자리에 앉아서 바로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을 시작할 수 있다. 주의할 점은 단 한 가지다. 

“테두리가 되는 부분은 최대한 당겨 형태를 살려줍니다.”


  교사가 틈틈이 확인하고 조금만 수정해주면 교실에 있는 거의 모든 아이가 글자를 변형하는 것에 성공한다. 동물 테두리는 빼고 변형한 글자만 도화지로 옮기면 채색 단계만 남는다. 미술 기능과 실력에 상관없이 타이포그래피를 해낸다. 그것도 엄청나게 빨리.


3. 누구나 다룰 수 있는 도구

  실컷 잘 그린 스케치를 채색 단계에서 망치는 방법은 아주 쉽다.

“원하는 채색 도구를 선택하세요.”

  대다수 초등학생은 물감으로 미세한 작업을 하는 것이 힘들다. 색연필은 아무리 칠해도 어떻게든 도화지의 하얀 부분이 보이고 칠할수록 얼룩덜룩해진다. 글자를 명확하고 깔끔하게 하고 싶을 때, 초등학교 교실에서는 유성마카를 꺼내면 된다. 누구나 쉽게 다룰 수 있기 때문에 역시나 특별한 기능이 필요 없어진다. 유성마카를 이용해 글자 안을 가득 채워도 되고, 원한다면 무늬를 넣을 수도 있다. 물을 쓰지 않으니 깔끔하고 손이 가는 대로 선이 나오니 원하는 대로 꼼꼼하게 칠할 수 있다. 작품에 맞는 채색 도구의 비계설정은 작품의 완성도와 성공률을 높인다.


  평소 미술을 잘하는 아이가 아님에도 수업 목표에 도달한다. 수업 목표는 ‘타이포그래피’였고 글자 변형을 잘하면 되는 것이다. 교사가 글자 변형을 제외한 모든 것에 비계를 두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온전하게 타이포그래피를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타이포그래피는 비계설정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수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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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해야 비로소 미술이다

여백의 미. 미완성의 미학.

  초등학교에서는 이것이 아름다움이 아니다. 초등학교 미술 수업에서는 여백과 미완성은 게으름이라고 말하고 싶다. 문장을 마칠 때 마침표를 찍듯이 미술 작품을 만들 때는 꼭 완성해야 한다. 하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미술 시간만큼은 완성이 어렵다. 왜 그런지 몇 년을 고민했다. 내가 너무 어려운 주제를 던진 걸까. 요즘 학생들이 미술을 못하는 걸까.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게을러서 그런 것이었다. 


  미술 수업을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잘 그리면 되는 줄 알았고, 멋진 작품을 뽑아내야 잘한 미술 수업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미술 수업은 학생들에게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본인 스스로 미술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그림을 잘 그리는 몇몇 친구들이 어차피 더 잘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학생들에게 이번 수업을 통해 무엇을 배웠냐고 물어보면 역시나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지난날 교사인 내가 미술을 쉽게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런 준비 없이 수업을 시작했었다. 제대로 설계되지 않은 수업은 학생들이 지나치게 많은 것을 하게 했다. 그것도 단 2차시 안에 완성까지 요구했다. 내 수업을 돌아본 그 날부터 미술 수업을 다시 설계했다. 


“오늘 수업의 목적은?”

“완성을 위해 설정해야 하는 비계는?”


  곳곳에 설정한 비계 덕분에 학생들은 교사의 의도대로 수업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드디어 오늘 자신이 어떤 미술을 배웠는지 쉽게 대답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치밀하게 설계된 ‘비계’덕분이다.


  미술에서 완성의 경험은 정말 중요하다. 이 경험은 성공과도 같다. 계속 맛보는 완성과 성공은 곧 성취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삶 속에서 미술을 향유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어려운 기술과 수준 높은 작품에 연연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우리 반 아이들이 “선생님, 다했어요! 잘했죠?”라며 뿌듯하게 자기 작품을 칠판에 붙이고 들어가는 미술 수업이 학교를 가득 채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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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교육연구회 ‘하다(HADA)’ 

  2018년 4월, 미술교육을 사랑하는 선생님 스무 명과 모여 미술교육연구회 ‘하다(HADA)’를 만들었다. ‘하다(HADA)’는 ‘하얀 도화지를 가득 물들이다’라는 뜻으로, 미술은 아이들의 마음을 다양한 경험과 기억으로 물들이는 데 교육적 의미가 있다는 뜻을 담았다. 

  하다는 ‘미술’교육연구회이니만큼 당연히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미술‘교육’연구회이므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그림을 그린다. 교사가 수업에 앞서 작품을 먼저 그려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해당 수업을 하기에 가장 적절한 재료를 찾을 수 있으며 학생들의 수준을 고려하여 비계를 설정할 수 있다. 게다가 혼자가 아닌 여럿의 선생님들과 함께 준비한다면 그 효과는 배가 된다. 혼자 미술 수업을 진행해야 하는 교사라면 표현의 다양성을 접하는 것은 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다는 교육전문감성웹진 ‘에듀콜라’ 누리집에서 연구회원들이 연구한 미술 수업을 글과 사진으로 연재하여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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