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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쌤과 산골 학교 아이들의 좌충우돌 한 해 살이


크흑, 이제 멸망인가

글_ 탁동철 강원 조산초등학교 교사




  “내가 엄청 힘들게 뚫은 건데, 나쁜 …. 헝헝….” 울며 소리치며, 쿵쿵쿵 교실 바닥에 자기 머리를 짓찧으며, 아주 난리다. 저러고도 6학년이냐,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물러나 지켜보는 수밖에.

    “내 석탄! 똑같이 해놓으라고! 50분 동안 힘들게 팠으니까 너네도 50분 동안 파라고. 헝헝….” 석탄이 아니라 모래겠지. 검은색 모랫더미. 잔디 사이 틈을 메우려고 운동장 귀퉁이에 뿌려놓은 건데, 아이들이 거기 몰려들어 논다. 길 만들고, 탑 쌓고 구멍 뚫고, 또 누군가는 남이 만든 것 신나게 부수고. 어제까지는 별문제 없이 지내왔는데 오늘 갑자기 무슨 생트집인지.

  성원이가 쌓은 석탄 작품을 발로 짓밟았다는 아이는 둘. 태준이와 현빈. 눈치 빠른 현빈이는 “너한테 소중한 건지 몰랐어. 미안.” 얼른 사과했다. 태준이는 죽어도 사과할 뜻이 없다. 책임을 지게 하려면 미리 알렸어야 하는데 부수지 말라는 푯말 같은 것 없었다, 그깟 거 삽으로 파면 금방 파는데 자기한테 50분 동안 파라고 하는 게 말이 되는가, 기적 같은 논리, 받아들일 수 없다 한다.

  “그까짓 거? 그게 왜 그깟 거. 헝헝….”

  누가 보더라도 이마가 터지도록 통곡할만한 사건은 아닌 것 같은데. 보통 사람은 못 느끼는 어떤 감정의 주파수 같은 걸 잡아내는 능력을 가졌는지. 아주 작고, 안 보이고, 안 들리고, 흩어지고 스러지는 느낌들을 움켜쥘 수 있는 특별한 무엇. 남들한테는 없는 기관이 몸속에 하나 더 있는 것 아닐까. 놀부한테 있다는 심술보가 아니라 성원이한테만 있는 감성보 같은 것.

  성원이가 머리 찧던 자세 그대로 멈췄다. 자는 듯 엎드렸더니, 눈물 찍어내며 공책에 뭔가를 적었다.

  내 소중한 성. 뚱이 집 같이 생긴 성. 석탄으로 만든 성. 정성을 다해 만든 성. 그걸 무너뜨렸어. 확 부서졌어. 허무하게 무너졌어. 내 마음이 다 무너졌어. 빗물처럼 빠르게 마음이 아퍼. 아주 정성을 다해 만든 동굴. 구멍 뚫는 데 50분 걸렸어. 손으로 파고 작대기로 파고. 그 동굴 속을 통해서 성에 올라가 보고 싶었어. 김주혁이랑 다연이랑 같이 파면서…

  모두는 안 슬픈데 자기는 슬프고, 분노는 땅 밑바닥으로 처박히고. 엄청난 예술가의 감성이다. 베토벤, 고흐, 권정생 같은 아이가 곁에 있었구나. 아무렇지 않게 버려지는 것을 붙잡고 건져 올리고 되살릴 아이, 뭉뚱그려지는 세계를 일으켜 깨울 특별한 아이. 이제부터는 오직 존경의 마음으로 대하리라.


모랫더미가 불러일으킨 아이들의 싸움
  다들 방과후 교실 가고, 나 혼자 교실에 있는데 유도코치한테 전화가 왔다.
  “선생님 얼른 나와 보세요. 지금 애들이 싸워서….”
  성원이는 손에 피를 흘리고, 태준이 핸드폰은 박살이 났다. 식식거리며 왜 싸우게 되었는지 떠벌린다. 둘의 말을 정리하면 이렇다.

  태준이는 방과후 시간 빼먹고 모랫더미로 갔다. 부순 것 원래대로 해놓으려고. 삽으로 구멍을 파는데 아무리 해봐도 안 됐다. 파면 무너지고 파면 무너지고. 힘들어서 잠깐 그네에 앉아 쉬는데, 그 순간 성원이가 나타났다. 보니까 모랫더미는 마구 헤쳐졌고, 그나마 남아있던 구멍마저 뭉갰고. 엉망으로 망쳐놓은 그 나쁜 녀석은 룰루랄라 태평스럽게 그네나 타고 있고. 용서할 수 없다, 분노 폭발, 눈이 훼딱 뒤집혔다. 욕하고, 가방 집어 던지고, 주먹이 오갔고, 어느 순간 핸드폰으로 머리통을 퍽!

  다음날 교실회의를 열어 잘못을 따졌다. 사회자가 하나하나 지적하며 칠판에 적었다. 미안한 것 갚으려고 구멍 다시 뚫어주려 한 태준이 마음은 칭찬, 구멍 뚫기 실패로 더 망쳐놓은 것 잘못, 사과하려는 마음 못 보고 오해해서 덤벼든 성원이는 잘못, 욕한 것 잘못, 가방 던진 것 잘못, 주먹 휘두른 것 잘못. 이 모든 잘못 중에서도 손에 도구를 들고 공격한 잘못이 가장 크다는 결론이 나왔다.

  성원 : 욕 1,000+오해 1,000+주먹 2,000+가방 6,000 = 10,000 
  태준 : 욕 1,000-사과 1,000+실패 1,000+주먹 2,000+도구 7,000+상처 9,000 = 19,000

  둘은 반성문을 썼고, 쉬는 시간마다 봉사활동을 했다. 성원이는 일주일 만에 마쳤고, 태준이는 그보다 좀 더 오래 끌다가 마쳤다. 벌은 끝났지만 아직 남은 게 있다. ‘핸드폰 금지.’ 태준이는 핸드폰을 남 공격하는 무기로 썼으니 다시는 손에 들지 못한다. 한 가지 길은 열어 놓았다. ‘제 손으로 벌어서 사는 것은 허용.’

  태준이가 벌어보겠다 했다. 실제로 돈은 안 받고, 날마다 일값을 계산해서 망가뜨린 아이폰 값이 될 때까지 일을 하는 것이다. 값이 되면 그때는 누가 사주든지 말든지 상관 안 함. 그로부터 한 달 가까이 교실에서 공부 시작 전에 되풀이하는 일, 태준이가 집에서 한 일을 말하면 그걸 돈으로 계산해서 장부에 적어놓기. 방 한 칸 청소는 2,000원, 변기통 닦기 2,000원, 접시 닦기 1,000원, 이런 식으로.

  5월 23일까지 77만 6,000원어치 일을 했다. 일을 안 해도 되는 성원이까지 나섰다. 자기 때문에 친구가 고생하니까 자기도 날마다 일을 하는 중이라고. 멋지다. 아름답다. 분노 조절이 안 돼서 문제? 폭력적이어서 문제? 아니다. 무겁게 누르는 바위틈을 비집고 잎 내미는 풀싹처럼, 온갖 무게를 헤쳐내며 자기 길을 찾아 나갈 아이들이다. 하늘의 나라가 있다면 바로 이 아이들 있는 지금 여기 이 자리 아니겠나.

 요즘은 둘의 싸움을 노래, 춤, 연극으로 만드는 중이다.

  제 1장. 교장 선생님 등장. “이야, 이거 예술이네. 누가 이렇게 예쁜 구멍을 뚫었을까.”
  제 2장. 아이들 등장. “와, 부수자!” 발로 밟는다. 정지. 성 부수는 노래 시작.
  성원이가 쌓은 성/위험해 위험해/태질라가 성을 공격한다/후화악 후화악/뜨거워 뜨거워/전원 공격!/피익 퓽 두두둑 두두둑 깽깽/쾅 피이익 쾅/대장님 우리의 공격은/태질라의 피부조직을 뚫을 수 없습니다./크흑 이제 멸망인가….


   주제는 ‘아름다운 인생’ 쯤으로 할까? 사건을 돌아보며 ‘그때 이랬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게 있으면 살짝 비틀어 바꾸고, 우정과 의리의 순간은 더욱 부풀려 빛나게 하고, 배경 음악 넣고 되풀이 연습하며 우리는 점점 좋아진다.

  “얘들아, 우리 동남아 순회공연 갈까?”



필자는 1968년 강원도 양양군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같은 마을에서 살며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 현재 전교생이 39명인 조산초등학교 산골 아이들과 산과 바다를 누비며 작지만 확실한 교육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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