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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조용하고 평범한 효준

글_ 김서규 유신고등학교 진로진학상담교사

 

  알고 보면 평범한 아이는 한 명도 없다. 부모조차 평범해 보이는 아이들이 힘겨워할 때 지나치기 쉽다. 이들이 자신을 표현하고 힘겹게 살지 않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

아이 내부 문제에 주목  
알아주기만 해도 큰 도움
잦은 만남과 대화로 변화

 


효준 문제

  효준이를 알게 된 건 효준이의 친구 정식이가 상담실에 와서 얘기하던 끝이었다. “선생님, 걔는 좀 이상해요. 노숙(老熟)해요.”
  “노숙한 게 뭐니?” “현자모드(賢者mode)로 살아요. 말도 별로 없고요. 끼어들지도 않고 끼워줘도 흥이 없어요. 아뇨, 예의상 좀 어울리는 정도긴 하죠. 착한 애인 건 맞는데, 얘기하다 보면 아닌 것도 같고요. 아, 맞다. 수업시간에 선생님들을 노려보면서 피식피식 웃어요. ‘너 왜 그러니?’ 물어도 대답 안 해요. 선생님, 이거 상담이 필요한 거 아녜요?”
  중하위 성적에 품행은 정상인 듯 그리고 학급에서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아이, 막상 대해보면 뭔가 간단치 않은 분위기에 속을 내보이기 싫어하는 아이. 실력에 비해 자존심이 의외로 센 아이, 세상에 대해서 드러나지 않게 짜증 내면서 마치 넙치처럼 바닥에 가라앉아서 이목을 피하는 아이. 현행 학교제도 내에서 이게 무슨 개인 상담을 할 꺼리가 되나?


효준 진단
  정서행동검사 수치를 빌미로 효준이를 상담실로 부르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타났다.  학원에 가야 하기 때문에 상담할 시간이 없으며, 상담을 왜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상담선생님에게 할 얘기가 없으며 자신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학교에 잘 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효준은 그런 얘기를 하면서 상담선생님이 말할 때마다 침을 뱉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성을 냈다.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선생님이든 뭐든 불편해 죽겠으니 빨리 보내 달라는 태도를 보였는데, 불손과 경멸과 짜증을 가득 풍겼다.
  상담선생님이 ‘사실은 네가 여름 방학 때 경기장 뒷길로 가다가 어떤 여자분의 유방을 움켜쥔 적이 있지? 그 여자분이 운동선수여서 너를 잡아서 성추행범으로 경찰서에 넘기려다 학교로 전화해서 ‘학교 선생님이 책임지고 교육하신다는 조건으로 학교에 넘길게요.’ 했잖니? 00선생님이 그 전화를 받아서 그 여자분께 너 대신 싹싹 빌고 조용히 처리하셨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 상담을 받는 거야.’ 하자 효준이는 무너졌다. 이래서 알고 보면 평범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이 아이에겐 성추행도 문제지만 이 아이 내부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그게 더 큰 문제다.


효준 지도
  효준은 성추행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자신의 일상을 노출했다. 그러면서 ‘내기 보기에도 나는 재미도 없는 아이고 남들이 보면 더 그렇게 보일 것’이라 했다. 이것은 현실 문제 너머 저 밑에 있는 자아상을 드러내는 말이고, 아이의 아픔이 엉겨있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효준이에게 있어서 성추행은 명백히 청소년 범죄이기도 하지만, 심리적으로는 재미없는 일상에 드라마틱한 요소를 도입하는 시도라고 할 수도 있다. 상담선생님이 언제부터 재미없는 아이가 되었느냐고 묻자 그는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었다.
  효준이의 고향은 남쪽 바다 어떤 마을이었는데, 아이들끼리 작은 포구에서 정답게 뛰어놀던 동화 같은 곳이었다. 그가 중학교 3학년 때 부모님들은 도시로 이사하셨고, 그는 친구들을 모두 잃고 갑자기 낯선 도시로 옮겨졌다. 낮엔 공교육 밤에 사교육에 시달리면서 학원에서 학원으로 이동하는 삶은 힘들었고, 옛 세계는 그립고 새 세계는 낯설기만 했다. 주말이면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옛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했지만, 친구들도 서서히 변해가고 마을도 변해가고, 옛 마을도 새 도시도 자신을 기억해 주지 않고 제멋대로 굴러가고 있었고, 그는 아차 하는 사이에 노바디(nobody)가 되어있었다.
효준이는 비유하자면 윤동주 시인의 시에 나오는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들의 이름, 이젠 별처럼 너무나 아슬히 멀리 있는 그들’을 부르면서 눈물을 흘렸다. 효준이는 마치 18세기 유럽인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고향 마을을 떠나 도시로 올라가서 격렬하고 비인간적인 산업화의 소용돌이에 빠지며 먼지처럼 바뀌는 니힐리즘의 세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식이가 바라본 효준이는 사라진 옛 세계를 그리워하면서 차가운 새 세계에 냉소를 보내는 중이었다.  
  억울은 알아주기만 해도 도움이 된다. 잿빛 도시에서 걸어 나온 무의미한 선생님이, 즉 효준이에겐 ‘아웃 오브 안중(out of 眼中)하던 선생님’이 의미를 띠기 시작하자 주변의 사물들도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둘은 계속 만나서 얘기를 했다. 드디어 효준이는 냉소적인 태도를 거두고 다시 싹싹한 시골 소년의 분위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 후 효준이는 친척이 하는 택배회사에 들어가서 물건을 운반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고 말했는데, 아마 할아버지 생신 때 근처 친척들 집으로 뛰어다니며 ‘빨리 저녁 먹으러 오시래요!’ 하고 외치던 일을 되풀이하려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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