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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싫은 영수

글_ 김서규 유신고등학교 진로진학상담교사

 

 

영수는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인데, 늘 교실 뒤편에 엎드려 있다. 3월 초에 여러 선생님이 깨웠지만 불손한 태도로 짜증을 낼 뿐이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다른 반에서 잠자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 신나게 노는데, 이때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담임선생님이 공부 좀 하라고 타이르다 못해서 상담선생님에게 의논하려 오셨다. “얘는 아빠하고 사이가 안 좋은가 봐요 그래서 학습에도 영향을 받는 것 같은데, 이런 복합적인 문제는 어떻게 하죠?”

 


영수진단


상담선생님이 영수를 만나보니 순순히 자기 얘기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 운동을 했고 중학교도 운동특기자로 진학하려 했는데, 아빠가 강제로 그 꿈을 꺾었고 그때부터 너무 억울해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아무것도 안 했다고 했다. 이젠 공부를 그만둔 지 4년이어서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첫 상담을 끝내고 상담선생님이 담임선생님에게 말했다. “영수는 학습상담이 필요한 것 같아요. 1단계는 제가 심리상담으로 학습동기를 갖게 하고, 2단계는 함께 영수에게 알맞은 학습계획을 짜게 하고, 3단계로 선생님이 영수가 잘 실천하도록 도와주시는 게 좋겠어요.”

 

 

영수지도


상담선생님이 3회에 걸쳐서 영수의 얘기를 들었다. 얼마나 운동을 좋아했는지, 얼마나 아빠가 억압적이었는지, 자신의 꿈이 깨졌을 때 얼마나 앞이 캄캄했는지, 그 세월이 4년에 걸쳤을 때 어떻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버텼는지. 몇 주 후 격렬한 감정의 폭풍이 수그러들 무렵 상담선생님이 물었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자기 아들은 소중히 여기는 법인데, 너의 아빠는 왜 너의 꿈을 깼을까?” “아마 장래성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 그러고 보니 아빠 말이 맞을 수도 있어요. 제가 야구부에서 운동을 그렇게 잘하진 못했어요. 계속했어도 별 볼일이 없었을 수도 있겠네요.” 영수는 자신이 말해놓고 한참 멍해졌다.


상담선생님이 말했다. “영수야, 너는 여태까지 아빠가 꿈을 꺾어서 4년간 억울하게 살았다고 했는데, 지금 판단해보니 아빠 말도 영 틀린 건 아니네. 자, 네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어. 아빠를 원망하면서 계속 화를 내며 살기, 플러스로 해마다 만나는 선생님들께 너의 ‘억울 스토리’를 들려주고 공부를 안 하는 이유를 이해받는 것, 두 번째 길은 억울을 접고 지금부터 새로운 미래를 찾아보는 것. 두 번째 길로 가겠다면 내가 도와줄게.”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억울하게 큰 피해를 당하기도 하는데 그때 그 피해를 가슴 한복판에 새기고 평생 피해자로 살지, 아니면 비록 피해가 크지만 자기 인생의 주요한 사건이 되지 못하도록 가슴 언저리로 밀어내고 다시 용기를 낼지 선택한다. 영수는 많이 힘들어하다가 자신이 자랑(?)하던 ‘억울 스토리’를 잊었다. 


영수는 저녁에 요리를 배우러 다니고 낮에는 영어와 국어를 공부하기로 했다. 아침에 학교에 오면 하루 중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을 번호순으로 플래너에 쓰고 그 옆에 그 일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적고 하나씩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시간을 낭비하던 습관을 줄여 주었다. 또 담임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서 도저히 따라가기 힘든 학과 시간에는 자신의 수준에 맞는 책이나 요리책으로 자습을 하기로 여러 선생님들의 양해를 얻었다.


영수야, 네가 만든 ‘억울 스토리’는 드라마틱하긴 했지만 좀 어두웠어. 그런데 지금 가는 길은 힘들고 낯설지만 밝은 길 같아. 부디 좋은 요리사가 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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