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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바퀴에서 내려오기

글  김석수 경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을 경험한다.

  그리워하던 옛 친구를 우연히 만나기도 하고, 예상하지 못한 사고를 우연히 당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연’은 우리에게 기쁨의 자리이자 고통의 자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제거하려고 하듯이,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우연’도 극복하려고 한다. 그런데 우연의 극복은 이를 예측 가능성으로 전환하는 법칙 확립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연과 사회 모두에 작동하는 우연적 요소들을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법칙으로 전환하려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유와 안정을 누리려고 한다. 인간이 이런 갈망을 갖고 있는 이상, 이렇게 법칙을 설정하려는 노력을 중단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법칙을 많이 확립하면 할수록 인간은 그만큼 이 법칙에 더 많이 지배를 받고, 더 많이 길들여지기도 한다. 이 점에서 법칙은 인간에게 안전과 자유를 안겨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길듦과 구속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길듦과 구속을 감내하면서 안전과 자유를 누리려고 한다. 그래서 시간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새로움을 맞이하는 지각 활동이나 상상 활동보다는 이미 익숙한 기억 활동에 머물기를 더 선호하기도 한다. 사실 새로움 속에 솟아나는 우연성이 우리를 부담스럽게 할 때, 우리는 새로움으로 향하기보다는 익숙함으로 향하려고 한다. 이 같은 경향은 나이가 들수록 우리에게 더 강해지곤 한다.

  그러나 이 기억 활동이 새로움을 외면하고 과거 속에 나를 침잠시킨다면 나는 더 이상 세계와 열린 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 세계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내가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내가 세계로 개방되기 위해서는 내가 예측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 열린 지각과 열린 상상으로 임해야 한다. 늘 새로움을 안겨주는 지각 활동과 늘 새로움으로 향하는 상상 활동에 우리가 참여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의 세계에 갇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나의 삶은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루 이틀 쳇바퀴에 갇히는 것은 나에게 안식일 수 있지만, 생애 전부가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늘 같은 삶을 반복하는 단조로움은 안식을 넘어 절대 무의미를 안겨주기 마련이다.


늘 같은 삶을 반복하는 단조로움은

안식을 넘어 절대 무의미를 안겨주기 마련이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면 이 단조롭고 무의미한 삶에서,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는 내가 나의 삶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는 성찰의 계기를 가질 때 가능하다. 누구나 먹어야 되기 때문에 그냥 먹고, 일해야 되기 때문에 그냥 일한다면, 그래서 그냥 살아간다면, 그는 사실 죽은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산 삶은 내가 언젠가는 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때 가능하다. 우리는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아주 소중한 분이 우리 곁을 떠나는 슬픔도 경험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평소 아무 반성 없이 살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누구나 죽음이라는 사건을 목격할 때 근원적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 죽음이라는 사건을 잊고 살고 있다. 마치 죽음이 나와는 무관한 사건인 것처럼, 그저 망각한 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주장처럼 죽음은 절대 익명적 사건으로서 기약도 없이 불현듯 우리에게 찾아온다. 우리 인간이 정복하기 어려운 절대 우연성의 영역이 바로 죽음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런 우연성 앞에 직면할 때 우리는 가장 큰 고통을 느낀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큰 고통에서 비로소 매너리즘에 젖어있는 자신의 삶을 깨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나의 죽음에 대한 성찰은 나의 삶을 거듭 태어나게 함이다.

  그러나 사실 일상에서 늘 죽음을 자각하며 살아갈 수만 없다. 어쩌면 이런 삶이 나를 거듭 깨어나게 만들기보다는 더 우울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나를 벗어나게 하는 것은 죽음 사건에 대한 성찰만이 아니라 내가 만나지 못한 세상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함이다. 여행을 통해 세계를 직접 체험하고 독서를 통해 세계를 간접적으로 체험함으로써 나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으며, 쳇바퀴에 갇힌 나를 구출해낼 수 있다. 사실 이 체험은 새로운 일을 위한 놀이로서의 역할도 한다. 이런 체험과 놀이에 참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과거에 갇힌 기계적 기억을 넘어 살아있는 지각과 상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는 비로소 일상에서 정신없이 같은 일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나를 거듭 태어나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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