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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글_ 김석수 경북대 철학과 교수

 

 

인간은 시간 속에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 온다는 것은 시간과의 만남이며,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시간과의 이별이다. 이처럼 인간에게 시간은 탄생이 시작되는 자리이자 죽음이 기다리는 자리이며, 따라서 기쁨과 슬픔이 함께하고 있는 자리이다.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은 시간과의 만남에 대한 기쁨의 표시이며,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시간과의 이별에 대한 슬픔의 표시이다.

 

인간은 때로는 더 기쁘고자 시간을 마음껏 누리려고 하며, 때로는 덜 슬프고자 시간을 잊으려고 애쓴다. 이처럼 인간에게 시간은 희망의 자리이자 절망의 자리이다. 우리의 인생은 이 시간이라는 야누스와 운명을 같이한다.

 

 

시간의 노예가 된 오늘날 현대인

 

 

더욱이나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오늘의 우리는 시간이 곧 돈이어서 이 시간을 결코 헛되이 쓸 수 없다. 이토록 시간과 돈이 강하게 결합된 사회에서 우리가 시간에서 자유롭기란 결코 쉽지 않다. 지금 우리는 시간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지배를 받고 있기도 하다. 자본가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려고 한다. 속도가 빠른 시간일수록 더 많은 돈을 번다. 그러므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시간에 속도를 더 가미해야 한다. 이른바 시간의 초고속화는 이윤의 최대화이다. 초고속 열차의 운영이나 초고속 광케이블의 설치는 우리에게 편리함을 안겨주지만 이윤추구로도 이어져 있다. 전달의 속도, 이동의 속도가 더 빠를수록 더 많은 돈을 버는 이 시대에는 우리 모두가 속도에 떠밀려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런 삶을 오늘의 도시인의 삶 속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도시에 살아가는 현대인은 그 누구보다 시간에 더 얽매여 있다. 마을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사이버도시로 이동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여유를 갖지 못한다. 자본과 권력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동하는 이런 사회에서 우리들 모두는 그만큼 더 빠른 속도에 떠밀리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현대인은 고독할 시간조차 없다. 저마다 시간에 얽매여 고독을 잃은 채 고립된 공간에서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다. 이 고립은 우리에게 우울을 낳으며 자살을 불러오기도 한다. 오늘날 도시가 병들어가는 것도 우리가 시간에 노예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간에 노예가 될수록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우리가 시간을 통해 살아야지 시간이 우리를 살게 해서는 안 된다.

 

 

이제 우리는 이런 속화되고 물화된 시간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간에서 생명이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바로 거기에 느림의 미학이 자리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속화되고 물화된 시간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간에서 생명이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바로 거기에 느림의 미학이 자리하고 있다. 이미 오래 전인 1990년대에 오스트리아에서 ‘시간 늦추기 모임’이, 이탈리아에서 ‘슬로시티(slow city)’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들은 더 이상 인간이 시간에 노예가 되는 길을 원치 않았다. 이들은 시간을 주체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마련하려고 하였다. 사실 시간을 늦춘다고 해서 게으르게 사는 것은 아니다. 시간을 늦춤은 곧 성찰의 시간을 가짐이다. 시간에 쫓기게 되면 정신이 없어지며, 정신이 없어지면 불행을 불러오기 십상이다. 정신없는 삶은 가족과 이웃을 잃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근원적으로는 자신을 잃게 만든다.

 

 

느림의 미학과 놀이

 

 

자신을 찾는 삶, 이웃이 있는 삶은 시간 속에서 여유를 찾을 때 가능하다. 노동은 성공, 놀이는 실패라는 이 공식에서 벗어나 놀이하는 노동으로 우리가 나아갈 때에만 비로소 나와 이웃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그 어느 사회보다 성장을 중시해온 사회이다. 아니 우리 사회는 급성장을 위해 압축근대화를 감행해야 했던 사회였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야 했던 우리들 각자는 너무나 여유가 없는 개인들일 수밖에 없었다. 정신없이 살아야 했던 우리들은 저마다 자신을 잃고 이웃을 잊은 채 고립과 우울을 겪어야만 했다. 우리 사회가 가장 우울한 사회가 되고 OECD 국가 중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사회가 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성장의 시간을 넘어 나눔의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부모와 자식이 나누고, 선생님과 학생이 나누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나누는 새로운 시간으로 우리는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긴장, 압박, 쫓김의 시간이 아니라 설렘, 기다림, 이완의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사실 우리가 이런 시간을 맞이할 때 오늘의 시대가 요구하는 창조의 시대를 제대로 열어놓을 수 있다. 지식정보화 시대를 넘어 지식과 인공지능이 결합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창조하는 인간을 요구받고 있다. 창조는 상상력이 활성화될 때 가능하며, 이 상상력의 활성화는 여유와 놀이가 존재하는 문화에서 가능하다. 성장을 위해 놀이를 억압하는 기존의 문화로는 더 이상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갈 수 없다. 놀이를 통한 성장의 길로 향함이 오늘의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따라서 시간을 늦추고 놀이를 통해 자신을 열어 이웃과 함께 하는 삶, 그 속에서 무한한 상상의 놀이가 가능한 새로운 시대를 우리는 열어가야 한다. 니체가 학문은 즐거워야 한다고 했듯이, 우리의 교육 역시 놀이하는 수업으로 거듭 태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럴 때 비로소 오늘의 우리 교육이 지향하는 ‘인문학적 상상력을 갖춘 창의·융합형 인재’를 길러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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