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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폭력과 시인의 길

글_ 홍정선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전 『문학과지성사』 대표)

 

윤동주의 죽음이야말로 폭력의 시대를 증언하는 상징이며, 폭력을 미워해야 한다는 상징이며, 폭력이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상징인 것이다.

 

  윤동주에게 가해진 것은 시대의 폭력이었다. 일본제국주의 말기라는 폭력의 시대가 윤동주를 타살한 것이다. 윤동주의 이같은 죽음과, 일본 경찰이 그에게 덮어씌운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란 혐의는 그를 ‘애국시인’ 혹은 ‘저항시인’으로 간주하는 주요한 근거가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윤동주를 ‘저항시인’이라 부르는 것이 탐탁하지 않다. 그것은 이 말이 윤동주의 본질적 모습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시대의 폭력에 정면으로 맞서 싸운 투사가 아니라 시대의 폭력을 순한 양처럼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는 「서시」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 시대의 폭력 앞에서 마음 아파한 사람이며, 그럼에도 시대의 폭력에 맞서 칼을 든 사람이 아니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슬픔과 연민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다.

 

슬픔과 연민의 길을 걸어간 시인, 윤동주
  증오는 증오를 낳고,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폭력의 종식은 폭력에 맞서는 또 다른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폭력을 무력하게 만드는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윤동주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폭력을 가장 확실하게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은 사랑이라는 것을, 자신의 고통과 수난을 통해서라는 것을 윤동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윤동주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고통스런 갈등을 겪었다. 이 사실을 우리는 그의 시 「십자가」에서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 그의 또 다른 시 「팔복」에서 보듯 윤동주는 예수 그리스도가 산상수훈에서 가르친 슬픔과 연민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인간이었기 때문에 주저하고 망설였다. 
  윤동주는 「십가가」에서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 데/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라고 썼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자각하면서 점점 ‘어두워 오는 하늘 밑에서’ 자신이 ‘쫓아오던 햇빛’의 길을, 다시 말해 복음서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을 온전하게 걸을 수 있을지 갈등을 겪었던 것이다. 윤동주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감히 “괴로웠던 사나이/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그 사실을 생생하게 말해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주어진 운명의 길을 걸어갔다. 그런데 나 = 윤동주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십자가가 허락될 것인가? 이 같은 갈등 앞에서 윤동주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자신에게도 ‘십자가가 허락된다면’이라 썼다. 윤동주가 ‘처럼’을 독립된 행으로 강조하고 ‘허락된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데에는 겸손함과 부러워하는 태도가 동시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윤동주는 자신에게 가해진 수난과 폭력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 ‘처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피를 흘렸다.

 

윤동주의 죽음, 그리고 그 시대의 폭력
  이런 점에서 윤동주의 죽음은 그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장엄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윤동주의 죽음이 말해주는 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가 ― 무고한 그의 죽음이 바로 그 증거인데 ― 끔찍하게 폭력적인 시대였다는 사실이다. 슬픔과 연민의 길을 걸어간 윤동주의 죽음, 한없이 선량한 윤동주의 죽음이 말해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폭력적 시대가 바로 그의 시대였다는 것을 다른 어떤 사람의 죽음보다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윤동주의 죽음이야말로 폭력의 시대를 증언하는 상징이며, 폭력을 미워해야 한다는 상징이며, 폭력이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상징인 것이다.
  르네 지라르는 “갈등과 폭력의 진짜 비밀은 바로 욕망하는 모방, 모방적 욕망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맹렬한 경쟁관계라고 단언”한다. 우리 모두는 어떤 폭력으로부터 수난을 당했을 때 시원한 복수를 꿈꾼다. 자신이 상대보다 더욱 강해져서 통쾌한 복수를 하고 싶어 하며, 이러한 욕망은 상대를 능가하는 폭력을 준비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그 결과는 폭력의 악순환일 따름이다. 지금 동북아시아에는 최근 북한의 핵무장에서 비롯된 군비경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상대를 이기고 앞지르기 위한 상호모방과 여기에서 파생되는 유형 무형의 폭력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대일수록 윤동주의 시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 가진 인문적 가치는 무척 소중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윤동주로 말미암아, 비록 윤동주의 시대와 그 폭력의 형태가 다를지라도, 우리 시대가 만드는 폭력을 미워할 수 있고, 또 그런 폭력을 종식시킬 수 있는 진정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