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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음하는 대지와, 침문하는 신

글_ 홍정선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전 『문학과지성사』 대표)

 

 

 

  20세기에 벌어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이전의 어떤 전쟁보다도 참혹하기 그지없는 전쟁이었다. 지상의 탱크와 화학무기, 바다의 잠수함과 항공모함, 하늘의 로켓과 비행기, 그리고 원자폭탄에 이르기까지 비약적으로 발전한 첨단무기와 대량살상무기들은 우리 인류의 지혜와 과학문명의 발전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데 아낌없이 동원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인간의 이성을 믿었던 사람들에게 재앙이었고, 과학문명의 발전에 환호하던 사람들에게도 재앙이었다. 역사의 발전을 의심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재앙이었고, 우리 인간을 사랑하는 자비로운 하나님을 믿었던 기독교인들에게 재앙이었으며, 무엇보다 무고하게 죽어간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끔찍한 재앙이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와 김은국의 『순교자』
  까뮈, 사르트르 등의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양차 세계대전의 이러한 끔찍한 재앙 속에서 탄생했다. 대지에 가득 찬 인간의 신음소리와 그 신음소리에 침묵으로 응답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목도하면서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외침을 이어받았다. 그리하여 까뮈는 『페스트』에서 신이 없는 세상에서 묵묵히 성실하게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신이 없기 때문에 자유로운 인간, 그래서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제시하며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들과 약간의 시차를 두고 이 땅을 뒤덮은 우리민족의 불행과 그 불행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하나님의 태도를 겪으면서 『순교자』라는 소설을 통해 “누가 과연 진정한 순교자인가?”라는 난감하고 도발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졌다.
  김은국의 『순교자』는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수복한 1950년 10월을 소설의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렇다. 6·25전쟁을 시작하기 직전 북한의 비밀경찰은 평양에서 열네 명의 목사를 체포하여 열두 명은 총살했고, 두 명은 죽이지 않았다. 열 두 명의 처형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문 신목사와 미쳐버린 한목사가 바로 그 두 사람이다. 국군의 평양 입성 후 정보처 평양 파견대의 장대령은 목사 살해 사건을 공산당의 만행을 보여주는 결정적 사건이라 생각하고 열두 명의 목사를 ‘순교자’로 모시는 추도예배를 계획한다. 그리고 소설의 화자인 ‘나’(이대위)에게 생존자 중 한 명인 신목사를 찾아가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라는 임무를 맡기지만 신목사는 자신은 현장에 없었다며 완강하게 진술을 거부한다. 그런데 방첩대가 체포한 북한군 정소좌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는 총살한 열두 명은 “꼭 개새끼들같이 훌쩍거리고, 낑낑거리고, 엉엉 울면서” “자기네 신을 부정”했기 때문에 죽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살려준 두 사람 중 한목사는 미쳤기 때문에 신목사는 유일하게 당당했기 때문에 죽이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진실을 알게 된 나는 신목사에게 진실을 털어 놓으라고 집요하게 설득한다. 그렇지만 신목사는 그를 유다로 지목하는 신도들로부터 안전을 위협받으면서도, 인간의 불행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는 하나님을 확신할 수 없다고 고백하면서도 진실을 밝히는 것이 불행한 사람들, 희망을 잃은 교인들을 더 불행하게 만들 것이라 생각하며 고뇌를 거듭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신목사는 교인들 앞에 나서서 놀라운 행각을 벌이기 시작한다. 자신이 처형의 현장에 있었으며 유다였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거짓말을 하고 열두 명의 목사들은 의연하게 믿음을 지키면서 당당하게 죽어갔다고 증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열두 명의 순교자들은 하나님을 버린 자신까지 따뜻하게 위로하며 용서해 주었다고 증언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의 나약함과 위대함에 대하여
  기독교의 입장에 다르면 이 세상은 신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창조됐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이 미리 계획하고 예정해 놓은 목표-사르트르는 바로 이것을 부정하고 인간에게 자유롭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된다고 말했다-에 따라 움직인다. 이러한 기독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의지가 관철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지이다” 하고 기도한다. 그렇다면 전쟁의 참화와 인간의 불행도 하나님의 의지인가? 우리 어리석은 인간을 깨우치려는 하나님의 더 큰 뜻이 숨겨진 사건인가? 김은국의 『순교자』에서 신목사 역시 이 같은 인간의 의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면서도 그가 걸어간 길은 누구보다도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이자 순교자의 길이었다. 그가 걸어간 길은 그레이엄 그린의 『권력과 영광』이 그려놓은 위스키 신부의 모습처럼 인간의 고통과 죄악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길이었으며 그의 모습은 우리 인간의 나약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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