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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제주에서 만난 비경

글_ 양지선 기자 
사진_ 김경수 포토그래퍼



[ 마보기오름 정상의 억새밭 ]


제주는 계절마다 그 모습이 바뀌는 신비한 섬이다.
언제 방문하느냐에 따라 또 다른 풍경을 보여줘 질릴 틈 없이 새롭다. 그중에서도 제주의 가을은 청량한 하늘과 어우러진 바다, 억새 핀 오름,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뒤덮인 한라산 등 곳곳이 비경을 자랑한다. 마침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가을날, 제주를 찾았다. 가을 제주의 아름다움을 담을 눈과 귀를 활짝 열고 여정을 시작한다.



갯깍주상절리대, 자연이 조각한 기암절벽


  첫 목적지는 서귀포시 색달동에 있는 갯깍주상절리대로 정했다. 제주의 해안에서 볼 수 있는 절경을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주상절리는 지표면에 흘러내린 용암이 식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해안을 따라 1.75km 간 이어지는 갯깍주상절리대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40m에 이르는 돌기둥 절벽은 자연이 깎아놓은 그대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주상절리를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지만, 가는 길은 꽤 험난하다. 입구에서부터 펼쳐진 몽돌은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하는 대신 여간 미끄러운 게 아니다. 휘청휘청, 힘겹게 중심을 잡으며 기암절벽에 다가갈수록 그 위용이 드러난다. 억지로 만들 수 없는 사각형, 육각형의 돌기둥이 규칙적인 균열을 이루며 하늘을 향해 쭉 뻗어있다. 자연이 조각한 작품을 눈앞에서 바라보고 직접 만져볼 수도 있다.

  절벽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커다란 아치형 굴의 입구가 나온다. 천연 해식동굴이다. 폭은 좁고 천장은 높은 해식동굴은 마치 다른 세계로 통하는 통로 같다. 동굴 안쪽 천장에서 떨어졌을 암석들이 만든 짧은 경사를 오르면 다시 바다가 보이는 출구가 나온다. 주상절리대를 관통하는 동굴 속으로 바닷바람도 길을 따라 불어온다. 잠시 숨을 고르며 이곳이 만들어지기까지 시간의 흐름을 가늠해본다. 자연의 신비로움을 엿본 짧은 탐험을 마치고 다시 해안을 따라 돌아온다. 멀리 펼쳐진 주상절리 절벽은 가까이서 바라봤을 때와는 또 다른 웅장함을 준다.


[ 갯깍주상절리 ]

동양 최대 크기 법당을 자랑하는 약천사


  사찰을 방문하면 특유의 고요하고 정적인 분위기 덕분에 불자가 아닌데도 마음의 평안을 얻곤 한다. 그래서인지 여행을 떠나면 한 번쯤 그곳의 사찰을 둘러보고 싶어진다. 제주의 사찰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증을 안은 채 갯깍주상절리에서 차로 15분여 달려 서귀포시 대포동에 위치한 약천사를 찾았다.

  산을 오르지 않고 입구에서 걸어 내려가 만나는 사찰이 조금은 낯설다. 더 놀라운 것은 법당의 크기다. 약천사의 대적광전은 단일 법당으로는 동양 최대 크기를 자랑한다. 30m의 높이에 3층 구조로 지어진 법당은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느낌을 준다. 신발을 벗고 그 장엄함 속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본다.

  법당 안에 들어가자 3개의 커다란 불상과 마주한다. 법당의 크기만큼이나 거대한 불상은 한눈에 바로 담기 힘들 정도다. 그 앞에는 천장을 지탱하는 기둥을 타고 청룡과 황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화려함에 넋을 잃고 바라보다 은은하게 들려오는 불경 소리에 두 손을 합장하고 무언가를 빌고 싶어진다. 천장을 가득 채운 연등에서도 같은 마음이 느껴진다. 이들은 어떤 간절함을 담아 연등을 띄웠을까.

  외부에서 바라본 대적광전은 3층이지만, 내부는 4층의 구조로 되어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회랑에 작은 불상이 모셔져 있다. 불자들이 동참해 모였다는 8만 개의 금빛 불상들은 각기 다른 모습과 자세를 하고 있지만 하나의 불심이 보인다. 그 충만한 기운을 담은 채 대적광전을 나오니 멀리 서귀포 바다가 보인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사찰. 육지의 사찰과 또 다른 점은 야자수와 귤나무가 있다는 것이다. 약천사는 약수가 흐르는 절이라는 이름처럼 경내에 맑은 약수가 샘솟는다. 약수 한 모금과 함께 이국적인 사찰 풍경을 한 바퀴 둘러보는 것도 좋다. 울려 퍼지는 목탁 소리에 상념도 고요해진다.


[ 약천사 ]


마보기오름 억새밭의 은빛 물


  서귀포에 다시 제주시로 향하는 길, 한라산 중턱의 산록남로 상에는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작은 이정표가 있다. 도로반사경 아래 숨은그림찾기 하듯 숨어있는 이정표에는 ‘마보기오름 입구’라고 쓰여있다. 마보기오름은 마파람(남풍)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는 사람만 아는 억새 명소이기도 한 이곳은 아직 많은 관광객이 드나들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올가을 유난히 잦았던 태풍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길 위에 누워버린 나뭇가지와 수풀은 이리저리 몸을 맡겨버릴 수밖에 없었을 그 날의 바람을 짐작하게 한다. 쉽게 길을 내어주지 않는 수풀을 헤치며 완만한 경사를 오르다 보면 어느새 쭉 뻗은 삼나무들이 가리고 있던 햇볕이 점점 머리 위로 내리쬐기 시작한다.

  오름이 좋은 이유는 등산처럼 큰맘을 먹지 않더라도 쉽게 정상을 볼 수 있다는 것. 이정표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걸은 지 20여 분만에 오름의 꼭대기를 뒤덮은 억새밭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름 위에 펼쳐진 은빛 바다는 실로 장관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억새 물결이 일렁여 마치 억새 바다의 한가운데에 있는 듯하다.

  파란 하늘과 어우러진 은빛 억새밭을 눈에 담았다면 이제는 귀로 담아볼 시간이다. 선선한 가을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흩날리는 억새 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바람이 만드는 밀물과 썰물에 따라 은빛 파도가 연주한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 대신 바람에 나부껴 사락사락 얌전한 소리를 낸다.

  오직 가을에만 들을 수 있는 억새 소리에 집중해 멍하니 앉아있으면 오롯한 휴식을 즐길 수 있다.


협재해수욕장의 노을이 만든 풍경


  해가 조금씩 지기 시작할 무렵, 마지막 여정지인 협재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제주도의 바다는 모두 아름답지만, 그중에서도 협재해수욕장은 탁 트인 에메랄드빛 바다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고운 백사장을 밟으며 다가간 가을 바다는 고요하다. 얕은 수심 덕분인지 파도 소리마저도 잔잔하다. 물 위에 내린 빛은 반짝거리며 가까이 이끈다. 해변을 찾은 이들도 그 유혹을 이기지는 못한 듯, 서늘해진 날씨에도 기꺼이 그 속으로 두 발을 담근다.

  하늘이 점점 붉은색으로 물드는 시간, 일몰이 만들어내는 역광에 서서히 짙어지는 물빛을 가만히 바라보게 된다. 건너편 멀리 보이는 비양도까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질 때 다시 꺼내 볼 수 있는 순간으로 남기고 싶다. 도심에 갇힌 일상에서는 만나기 힘들 풍경을 두 눈에 최대한 담아본다.


[ 협재해수욕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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