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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꽃의 도시, 남원


글_ 강지영 명예기자(수필가), 사진_ 김경수 포토그래퍼

[광한루]

[완월정]


이제 막 고개를 내민 초승달이 시야에 맺힌다. 노란 달을 품은 검은 눈동자가 물결이 되어 넘실거린다. 처얼썩, 처얼썩. 눈 위에서 은빛 달이 일렁인다. 따사로운 여름 햇살이 내 것같이 느껴지지 않을 때, 사방이 생기로 충만한데 그게 나와는 멀어 보일 때, 그리하여 홀로 침잠해 인생을 관조해 보고 싶어질 때, 그럴 때면 달을 따라 무작정 도로를 달린다. 청량한 바람 속에 습관처럼 중얼거리고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음악 ‘What is a Youth’ 때문이었을까. 그 곡이 던진 ‘사랑’이라는 화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달에 깃든 사랑 때문이었을까. 충동적으로 나선 2019년 여름 초입의 여행지는 남원이다.



땅 위에 자리 잡은 월궁, 광한루
  달과 나란히 달려 남원에 도착한다. 도시는 어둠을 머금고 있다. 요천(蓼川)을 지나 광한루원에 이른다.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누각으로 불리는 광한루는 황희가 산수를 즐기던 곳으로 유명했다. 이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빼어난 이곳 경치를 일러 달나라 미인 항아의 월궁인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한 것을 계기로 ‘광한루’라 불리게 되었다.

  땅 위에 자리 잡은 월궁이라고도 하는 광한루를 찾아 들어간다. 빛으로 장식된 단청이 광한루원을 화려하게 물들이고 있다. 빛을 음미하듯 천천히 걸어 광한루에 이른다. 달나라 월궁과 지상의 월궁이 호수를 경계로 맞닿아 있다. 물속 광한루와 물 밖 누각이 빚어내는 장관에 눈이 시리다. 티끌만큼의 일그러짐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균형이 눈앞에 있다. 어둠이 있어 빛이 생명을 가질 수 있듯 삶 또한 결핍을 배경으로 채움을 배워가는 여정이라는 깨우침이 가슴을 울린다.


[춘향테마파크]

남원의 옛 이야기가 담긴 춘향테마파크
  남원의 신선한 새벽 공기를 맡으며 기분 좋게 눈을 뜬다. 이런 날에는 두 발로 길을 더듬어 가는 것으로 여정을 시작해도 좋으리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산책에 나선 칸트라도 된 듯, 여장을 챙겨 춘향테마파크로 간다. 춘향전을 테마로 만들어진 춘향테마파크는 2004년 5월 1일에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만남의 장, 맹약의 장, 사랑과 이별의 장, 시련의 장, 축제의 장을 주제로 춘향과 몽룡의 이야기를 구현해 내고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테마파크 초입에 이른다. 분수와 춘향전 등장인물을 형상화한 구조물을 지나 향토박물관으로 들어간다. 2,500여 점의 유물로 채워진 향토박물관에는 남원에 관한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다. 남원 연혁을 시작으로 남원에서 발굴된 유물과 남원 태생 명창, 남원의 시린 역사를 훑는다. 강도근, 김정문 등의 명창 이름과 ‘오늘이 오늘이소서’의 노래 탑 사연을 가슴에 담고 나온다. 향토박물관을 벗어나 돌탑, 맹약단, 그네 터로 채워진 맹약의 장을 지나 사랑과 이별의 장으로 간다. 단심정에 올라 남원을 내려다본다. 춘향이 된 듯 멍하니 한숨 짓고 앉았다가 천천히 항공우주천문대로 향한다. 비행기 모형과 행성 그림과 망원경으로 채워진 항공우주천문대에서 달을 만난다. 건물 한쪽에 자리 잡은 달 기원설에서 여정의 시작을 상기한다.

  나를 남원으로 이끈 것은 여름 달이 남긴 ‘침잠’이라는 두 자였다. 기울었다 차오르는 달의 형상을 눈에 담으며 생각한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이는 순간에도 스스로를 돌아봄을 게을리하지 않고 묵묵히 나를 곱씹어 내는 것, 그것이 내 속으로의 침잠이 아닐까.

[ 남원향토박물관 ]

[남원항공우주천문대]


정유재란 의사의 숭고한 넋을 기리다
  다음 여정은 노래의 탑이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 43인이 향수를 달래기 위해 부른 ‘오늘이 오늘이소서’의 사연이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이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든 만인의총 앞에서, 도공들의 한이 담긴 노래의 탑 앞에서 고개라도 숙여야 이 먹먹함을 덜 수 있을 터, 충렬사에서 향 하나를 피워올리고 역사 위에 손을 덧댄다. 지난날에 건네는 차가운 손이 말할 수 없이 부끄럽다. 그마저 하지 않으면 오늘의 의미를 잃을 것 같아 만인의총 앞에서 한 번, 노래의 탑 앞에서 또 한 번, 그렇게 두 번 손을 모아 묵념을 한다.

  ‘오늘이 오늘이소서, 매일같이 오늘이소서, 저물지도 새지도 말고, 날이 샐지라도 매일같이 오늘이소서.’는 고려부터 정유재란에 이르는 400여 년 동안 남원 지역에서 구비전승되던 노래였다. 이 노랫말은 『양금신보』에 채록되어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일본에 잡혀간 도공들이 그리움을 달래던 곡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시금 이 땅에 울려 퍼졌다. 허니 1988년 7월 26일 귀향 음악회에서 뭇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냈다는 이 곡에 서린 사연이 뼈아프게 느껴지는 것도 지나친 감상은 아닌 것이다. 과거가 없는 현재는 없다. 오늘은 지난 시간 위에 세워진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이들의 삶이 역사의 살이 되어 남았다. 그들의 살이 덧나지 않도록, 짓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일 것이다.

[만인의총 만인의사 순의탑]


연분홍 철쭉이 채운 지리산 바래봉
  남원은 그대로 떠나기 아쉬워하는 여객을 바래봉으로 안내한다. 승려들의 밥그릇인 바리때를 엎어놓은 것과 닮았다고 하여 바래봉이라 불리는 산이다. 바래봉은 봄이 여름을 향해갈 즈음이면 분홍빛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남원을 떠나는 허허한 마음을 꽃으로나마 채워보려 산을 오른다. 가축유전자원시험장에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간다. 많은 이들의 발이 지나가서일까. 길이 고르다. 평지 같은 산길을 걸어 철쭉 군락지에 이른다. 지리산 능선을 병풍 삼아 핀 꽃이 둥글고 완만한 산을 물들이고 있다. 달빛이 너울거리던 눈에 연분홍 꽃불이 인다. 가슴에 몽우져 있던 마음이 하늘하늘한 꽃잎 위에 흩뿌려진다. 바람이 철쭉꽃을 건반 삼아 멋들어진 음악을 만들어낸다. 산의 울림을 들으며 생각한다. 어쩌면 지금 넘어서고 있는 것이 산이 아닌, 달인 것은 아닐까 하고. 능선 넘기에 바빠 ‘나’라는 달이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분홍 꽃을 밥 삼아 허기진 이들의 영혼을 채워주던 바래봉. 산을 뒤집어 속을 파내고 그 안에 ‘사랑의 즐거움’이라는 꽃말을 가진 꽃을 한가득 담는다. 산에서 내려와 발그레 번지던 꽃이 전한 말을 흰 지면(紙面)에 옮겨본다. 그대에게도 꽃피는 계절이 당도할 것이다. 허니 어둠이 그대를 덮친다 해도 달빛을 벗 삼아 걷고 또 걸어라. 어둠이 든 시간, 노랗고 바알간 빛을 품고 나오며 남원에 이별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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