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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빛을 머금은 고장 영광

글_ 강지영 명예기자(수필가) 사진_ 김경수 사진작가

 

가슴 속 불씨가 아직 살아있을까.
이 붉은 씨를 피워올리면 다가올 겨울은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까. 들판은 수확으로 분주하고 중심
가는 축포를 쏘아 올리기에 바쁜 가을 어느 날, 불꽃을 닮은 꽃무릇을 찾아 나선다. 상사화의 속이라 하여 상사화로도 불리는 바알간 꽃과 홍색 노을이 완연한 가을을 알려오는 곳, 영광으로 간다.

 

상사화 군락지

 


가을이 오는 길목, 불갑사 꽃무릇
  상사화 전설이 깃든 백담호, 까치가 된 스님 설화가 담긴 벽화, 불길을 잠재웠다는 사천왕상. 곳곳에 깃든 이야기가 여행객들의 발을 붙들어서일까, 꽃무릇이 초대장을 보내왔기 때문일까. 가을이면 불이 난 듯 온통 벌겋게 물든다는 불갑사 앞은 이른 시간부터 인파로 가득하다.
  불갑사 초입, 거대한 물레방아가 발을 붙든다. 차에서 내려 불갑 테마 공원에 들어선다. 6년에 거쳐 완공되었다는 이 공원은 산책로와 정자, 인공폭포와 관상어, 연꽃과 화단, 조형물로 장식된 수변 생태 단지다. 아기를 안은 젊은 부부들과 팔짱을 낀 연인들과 지팡이를 짚은 나이든 청춘에게 청명한 하늘이 잘 왔노라는 손짓을 보내온다. 올가을은 어떤 추억을 남겨줄지, 영광은 또 어떤 이야기를 전해올지 하는 생각에 잠겨 걷다가 길을 돌아 나온다. 빨간 꽃무릇을 내려다보고 있는 천년 방아를 뒤로하고 불갑사로 향한다.
  대추, 무화과, 모시떡이 죽 늘어선 길을 지나오니 멋스럽게 꾸며 놓은 길이 길손을 반겨준다. 기타를 든 가객의 노래를 함께 흥얼거리며 들어선 길에 꽃무릇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나무 그늘을 지붕 삼아 붉디붉은 색을 드높이고 있는 꽃무릇. 광활한 꽃밭이 전해온 적색 장관이 명치를 찌른다. 무리 지어 핀 빨간 꽃잎들의 군무가 아득하고 아찔하다. 상해버리면 이듬해에는 개화하지 못한다는 꽃, 피고 지는 시기가 달라 잎과 꽃이 만날 수 없는 슬픈 꽃, 푸름과 붉음을 멋스럽게 피워올린 꽃무릇 길을 구름 위를 걷듯 사뿐히 지나온다.
  꿈처럼 꽃밭을 거닐다 이른 종착지는 불갑사다. 붉은 꽃으로 장식된 황색 돌담 가운데 불갑사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꽃을 무대로 독무를 펼치던 나비를 길벗 삼아 대웅전으로 향한다. 백제에 불교를 들여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세운 절 불갑사. 역사가 긴 만큼 대웅전을 포함한 보물과 문화재에 얽힌 이야기가 사찰 곳곳에 서려 있다. 까치가 된 스님 이야기를 새긴 벽화를 눈에 담고 대웅전으로 들어간다. 북쪽에 본존불을 둔 다른 절들과 달리 불갑사는 서쪽에 본존불을 앉혔다. 흔치 않은 배치에 멈칫한 것도 잠시, 태초에는 상하좌우가 없었다는 생각이 나를 지나간다. 위아래를 가르고 동서남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빠르고 느림을 이름 지운 것은 자연이 아닌 사람이다. 그러니 동쪽을 향해 앉은 불상이 이상한 게 아니다. 뒤돌아 곱씹어 보아야 할 것은 인위에 길든 내 눈일 것이다.
  절에서 나와 보리수나무와 바위로 가득 찬 선 명상체험실을 지나온다. 선 명상체험실 도안으로 사용했다는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를 사용했다는 안내문을 읽는다. 간다라 사원에서 본 따 만든 탑원을 둘러보며 ‘갖가지 꽃으로 장엄하는 일승(一乘) 진리 세계’라는 뜻의 화엄일승법계도를 곱씹는다. 문득 땅에 뿌리를 내리고 생의 불꽃을 피워올리는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우리네 모습을 닮았다는 생각이 나를 지나간다. 전소하듯 피었다 지는 꽃무릇처럼 남은 열정에 다시금 불을 지펴야 할 때인 것은 아닐까. 참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이 불그스레한 꽃이 내 삶을 향한 사랑의 불씨를 심어준다. 식어버린 가슴에 사랑의 씨를 뿌려준다.

불갑사 입구

 

  불갑사 불상

 

 

백제불교 최초도래지, 법성포
  빛에 따라 다른 모습을 비춰내는 곳, 영광에서의 두 번째 여정에는 시리고 찬란한 역사가 깃들어 있다. 영광에는 한국의 4대 종교 문화 유적지가 있다. 법성포를 통해 들어온 불교를 기념하는 백제불교 최초도래지, 원불교 창시자 탄생지에 있는 원불교 영산성지, 북한군의 교회 탄압에 대항해 194명이 순교한 기독교인 순교지, 천주교 신도들의 순교지인 천주교인 순교지가 그것이다. 시간이 켜켜이 겹쳐져 있는 영광의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 백제불교 최초도래지로 간다. 백제불교 최초도래지가 있는 법성포는 백제에 불교를 들고 들어온 마라난타가 최초로 발을 디딘 땅이다. 불교를 뜻하는 법(法)과 성인을 뜻하는 성(聖)을 합쳐 법성포라는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못 길을 걸어 마라난타 승려가 불교를 들여온 것을 기념해 만든 백제불교 최초도래지에 도착한다.
  간다라 양식의 일주문인 상징문을 지난다. 돌을 쌓아 올려 만든 간다라 양식의 문을 넘어서자 사면대불상과 부용루, 만다라 광장과 존자정, 간다라 유물관과 탑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형적인 한국 절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흥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인도도 백제도, 기원전도 2018년도 아닌 시공을 초월한 이곳의 독특한 분위기에 취해 앎을 그리고 삶을 곱씹는다. 적지 않은 곳을 돌아다녔는데도 발 닿는 곳마다 처음 보고 듣는 것투성이다. 걸어도 걸어도 배워도 배워도 부족한 걸 보니 살아온 시간만큼 채워지는 게 아니라 비워지는 게 삶인가 보다. 그리고 뭔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끊임없이 생각하며 다시금 새 여행지를 찾아 나서는 과정 그 자체인가 보다.
  마리난타 조각상을 안치한 유물전시관에서 간다라 미술을 눈에 담고 나와 법당으로 향한다. 부용루 벽 원석에 새겨진 석가의 생애에 둘러싸여 못을 내려다본다. 한자리에 앉아 ‘존재’라는 긴 사색의 길을 떠난 싯다르타와 간다라에서 쿠차와 장안, 길림성을 거쳐 백제에 들어와 불교를 전파한 마리난타. 하나로 이어지는 두 여정이 가슴을 파고든다. 여행은 새로운 것을 보여줘서가 아니라 나를 보는 새 눈을 주기에 의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퍼런 물결이 되어 속을 울렁이게 하는 감동을 손에 쥐고 백수해안도로 발길을 돌린다.

  백제불교 최초도래지

 

간다라 양식의 일주문

 

 

아름다운 길의 대표주자, 백수해안도로
  영광 대교를 거쳐 모래미 해변에 근처에 이른다. 바다를 거닐고 있는 여행객들이 해안도로에 들어서려던 내 손을 잡아끈다. 핸들을 돌려 차를 세운 후 사장에 내려선다. 가을 바다는 북적거리는 여름과도 고독한 겨울과도 다르다. 머금고 있던 빛을 안개처럼 피워올리는 영광의 가을 바다에는 기대가 있고 사색이 있고 기다림이 있다. 수평선을 캔버스 삼아 꽃무릇에서 받은 빨간 불씨와 백제 최초 불교도래지에서 받은 은은한 온기를 흩뿌려본다. 화기는 삭히고 열기는 더하고. 멈추지 않고 흐르는 물이 붉지도 푸르지도 않은, 풋내나는 길손의 열정을 손질해낸다. 그와 함께 정수리를 훌쩍 넘어선 해를 수면 위에 담아내며 유유히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간다. 수평선 위에서 산란하는, 노랗다고 하기도 붉다고 하기도, 그렇다고 푸르다고 이르기도 묘한 빛이 바다에 영광을 담아낸다.
  아름다운 길의 대표주자 중 하나인 백수해안도로는 백수읍 길용지에서 백암리 석구미 마을까지 이어져 있다. 기괴한 바위와 넓게 펼쳐진 갯벌, 바다와 석양이 빚어내는 풍경이 장관을 연출한다. 무작정 달리고 싶을 때, 머리를 비워야 할 때, 목전까지 차오른 감정을 터트려야 할 때, 누구보다 믿음직한 벗이 되어 줄 것 같은 길이 눈앞에 있다. 기암절벽과 광활한 수평선과 빛이 자연의 선물이라면 해안도로와 그 아래의 2.3km 산책로는 인생이라는 여정을 더불어 가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이 부쳐온 응원가다. 2006년 국토해양부에서 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고 2011년 대한민국 자연경관 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는 수식어는 이 길이 전하는 감동에는 사족일 뿐이다. 지나 본 후에야 품을 알 수 있고 직접 발을 디뎌 봐야 깊이를 알 수 있는 것이 길일 터, 해안도로를 관통하며 영광의 바다와 땅과 하늘을 가슴에 담는다.
  해가 떨어지고 있는 시간, 빛은 깊이를 더해가고 황혼은 짙어만 간다. 소중한 누군가의 손을 잡고 떨어지는 해를 보며 새날을 기약하는 것, 두 손 모아 살려낸 불씨를 내일이라는 장작에 놓을 채비를 하는 것, 그리하여 나라는 불길을 화마가 아닌 온기로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삶이 아닐까. 내일을 향하는 마음이 살아있는 모든 이들이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열정의 불씨이지 아닐까.
  영광에 닿은 사람들의 얼굴에 영광의 빛이 스며 있다. 영광이 선사한 빛 속에서 가을이 그렇게 무르익어간다.

백수해안도로에서 바라본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