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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천 년의 신비와 만나다

글_ 강지영 명예기자(수필가)  사진_ 김경수 사진작가

 

여린 잎이 단단해지는 여름 초입이다. 흰 꽃잎 한 줌과 빨간 장미 한 다발로 봄을 지나온 내게 무대를 내줘야 할 계절이다. 아쉬움과 후련함으로 봄을 배웅하고 나만의 무대에 오를 시간이다. 유월의 첫 무대는 누구나 주인공이 되어볼 수 있는 곳, 합천이다.
창을 열어 바람을 맞는다. 나무로 둘러싸인 푸른 도로 때문일까. 이 바람에 색을 입힌다면 투명한 녹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텁텁하지도 않고 축축하지도 않은, 적당한 물기가 스민 바람이 길손을 맞는다.

대장경테마파크

 

팔만대장경 품은 해인사
  해인사 쪽으로 간다. 어느 가을 붉은 단풍으로 나를 맞아주었던 해인사를 올해는 초여름에 찾는다. 해인사에 들어가기 전, 대장경테마파크의 문을 먼저 두드려본다. 대장경테마파크는 고려대장경 간행 천년을 기념한 ‘2011 대장경천년세계문화축전’의 개최와 함께 문을 열었다. 대장경테마파크에 들어서면 대장경 제작 과정, 대장경 모형, 대장경 탁본, 왕오천축국전, 일연의 삼국유사, 김부식의 삼국사기, 허난설헌의 허난설헌집, 김구의 백범일지 등을 볼 수 있다. 한국 기록사를 총망라해 놓은 것 같은 전시물들을 찬찬히 둘러본다. 3.1 독립 선언서, 대한극장 매표소, 대한민국 건국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사진들을 지나 빛 소리관을 거쳐 나온다. 81,258장의 경전과 5천2백여만 자. 그 수치가 머릿속을 맴돈다. 그게 참담한 현실 앞에 무력감을 느낀 이들의 눈물인 것만 같아 자꾸만 되뇌게 된다.   
  마지막 종착지는 해인사다. 절은 옷을 갈아입고 있다. 새벽이었다면 ‘소리 길’을 걸어 올라도 좋으리라. 차창을 열고 바람과 연등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귀에 담는다. 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유월의 무대, 해인사. 해인사는 신라 애증왕 때 창건된 절로 천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가야산에 위치한 해인사는 국내 최대 사찰로 세계문화유산을 비롯해 국보와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을 보유하고 있다. 한 자의 오·탈자도 없고 온도와 습도 조절 기능까지 갖춘 팔만대장경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많은 관광객의 발을 끌고 있다. 우주를 형상화한 듯한 성철스님 사리탑을 지나 해인사 앞에 이른다. 최평곤 작가가 기부했다는 조형물과 당간지주를 중심으로 나란히 걸린 연등이 길손을 맞아준다. 바람에 사각거리는 연등 소리를 들으며 일주문으로 들어선다. 줄지어 선 삼나무의 손길을 느끼며 봉황문과 해탈문을 지나온다. 삼층 석탑을 앞둔 대적광전 뒤에 팔만대장경 판본이 있는 장경각이 있다. 장경각으로 들어선다. 81,258장, 5천2백여만 자. 한 자를 쓰고 삼배를 하며 새겼다는 경판이 눈앞에 있다. 한 자의 오자도 없다는 팔만대장경. 한 가지 일을 완수한다는 것은 정성을 다하는 것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깨우침을 얻는다. 온 마음을 다할 것,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말 것, 굳건히 버텨낼 것, 그리하여 목표한 바를 이루어 낼 것. 시린 시간을 견뎌내고 이윽고 역사의 주인이 된 이들의 목소리가 귀를 지나간다. 타인의 눈을 신경 쓰느라 까마득히 잊고 있던 나 자신을 들여다본다. 장경각에서 나와 최치원의 지팡이가 나무가 되었다는 학사대를 지나온다. 대적광전의 불상 앞에 고개를 숙인 후 해인도에 들어선다. 번뇌와 망상이 멎을 때 참된 우주의 모습이 물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인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해인사. 속살거리는 연등 소리와 승려의 불경과 내 마음 속 번민을 한데 모아 걸음을 옮긴다. 살포시 어둠이 내려앉는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시간, 연등에 불이 든다. 승려의 불경소리는 흔들림이 없고 요란하던 내 속은 거짓말처럼 잠잠해진다.       

해인사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 영상테마파크 
  황강 옆 이주홍 어린이 문학관을 지나 영상테마파크로 향한다. 2004년도에 건립된 합천영상테마파크는 유수의 한국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유명하다. 영상테마파크는 1920년대에서 1980년대를 배경으로 제작된 오픈세트장으로 ‘각시탈’, ‘에덴의 동쪽’, ‘경성스캔들’, ‘써니’, ‘암살’, ‘택시’ 등 190여 편의 영화와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두 대의 마차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도보로 한 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를 마차로는 십오 분 만에 둘러볼 수 있단다. 내 걸음에 맞춰 이 공간을 담아보자 싶어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문을 넘어선다. 동대문행 전차와 전차로, 한자와 일본어가 섞인 간판, 나지막한 집과 낡은 공중전화 박스. 시계가 멎은 듯한 풍경이 발을 멈칫하게 한다. 영화에서나 본 적 있는 낯선 건물들 사이로 들어간다. 좁다란 골목에 낮은 지붕의 집들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손때 묻은 창문에 양장점, 레스토랑, 직업소개소, 연탄가게, 우동가게 내건 가게들이 1920년대의 한국을 그대로 보여준다. 골목길 끝, 택시를 그려놓은 패널이 보인다. 그 옆에 영화 암살의 한 장면이 전시되어 있다. 두 편의 영화에 동시에 들어간 듯한 착각이 든다. 영화 속 등장인물이 된다는 건 이런 느낌인가보다 하고 막연히 상상한다. 
  고개를 돌려보니 철교가 있다. 철교를 지나 김 약국을 거쳐 이른 곳은 원구단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이었다는 원구단에 들러 찬 커피 한 잔으로 목을 축인다. 드라큘라 저택에서 더위를 식힌 후 서울역을 거쳐 직접 아나운서가 되어볼 수 있다는 대한일보 영상체험관에 이른다. 마이크 앞에 서보는 생소한 경험을 마친 후 도깨비 미로 거울 체험장에 들어선다. 거울과 실상이 만드는 허상이 선사하는 재미에 빠져 있을 즈음 출구가 나타난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발을 옮긴다. 돈암장에서 적산가옥을 거쳐 동화백화점을 지나니 출발지에 닿아있다. 테마파크를 거닐며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들뜬 나를 발견한다. 그래, 가끔은 나를 무대 위에 세우는 이런 날도 있어야 한다. 아니, 내 하루하루가 나를 주인공 삼아 쓰는 새로운 시나리오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팔만대장경 판본이 있는 장경각

영상테마파크

청와대 세트장

 


푸른 생명길 정양늪 생태공원
  테마하우스1, 테마하우스2, 일본식 저택인 향원에서 묵어갈 수도 있다는 유혹을 뿌리치고 다음 목적지인 청와대 세트장으로 향한다. 청와대 세트장은 테마파크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산을 병풍 삼은 너른 터에 종로의 청와대와 똑같이 생긴 건물이 놓여있다. 차에서 내려서자 파란 잔디를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푸른 지붕의 청와대가 나를 반가이 맞는다. 지붕도, 산도, 잔디도 온통 푸른 게 여름이 왔다는 게 실감 난다. 청와대 세트장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에는 인왕실, 충무실, 세종실이 마련되어 있고 2층에는 집무실과 집현실이 마주 보고 있다. 실제 크기의 68%로 축소해 지었다는데 뉴스에서나 보던 청와대를 보고 있자니 괜스레 자세까지 바로잡게 된다. 인왕실에 전시된 사진과 충무실의 역대 대통령들 사진들, 세종실이라 적힌 국무회의실, 대통령이 집무를 보는 집무실과 성명 발표 등을 듣곤 했던 집현실. 천천히 건물을 둘러보며 청와대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도 이 자리에 한 번 앉아보자.’며 집무실 의자를 빼는 관광객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그 자리에 앉는 것으로 대통령이 된 듯한 기분에 젖어보는 것도 값진 경험이 되어 주리라. 그리하여 내 마음속 대통령은 언제나 나라는 것을 되새김질하게 되는 유월이 된다면 더없이 좋으리라.     
  다음 목적지는 정양늪 생태공원이다. 정양늪은 후빙기의 해수면 상승과 낙동강 본류 퇴적으로 만들어졌다. 황강의 수위 감소 등으로 습지 기능을 상실했다가 오 년에 걸친 사업으로 늪은 새롭게 태어났다. 3.2km에 이르는 ‘생명길’을 걷기 위해 모자와 물을 챙긴다. 기분 좋게 따끔거리는 햇살을 받으며 늪 위의 데크로 들어선다. 가시연, 수련, 어리연, 남개연, 왜개연, 물옥잠, 자라풀 등 수생식물이 있다는 설명을 읽으며 늪으로 들어간다. 물옥잠과 자라풀이 내 눈을 사로잡는다. 그 위로 아직 꽃을 피우지 않은 연잎이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다. 늪도 산도 심지어는 하늘도 온통 푸른 걸 보니 연꽃을 만나기에는 이른 때인가 보다. 연꽃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며 ‘생명길’ 끝에서 발길을 돌린다. 길을 돌아 나오며 생각한다. 어쩌면 호젓한 이 길이 삶의 길일지도 모른다고. 꽃이 피고 지는 것은 자연의 순리에 맡겨두고 나는 내 삶의 주인으로 내 길을 뚜벅뚜벅 가자고.

황강 앞에 세워진 고려시대 누각 함벽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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